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선거, 선거... 그리고 혼란 === >'''적들은 하찮은 벌레들이다.''' >---- > - 1932년 히틀러 >나치는 선전 활동에 최대한의 역량을 쏟아 부었다. 1932년에는 다섯 번의 선거를 치렀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독일 대통령]] 선거였다.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현란하고 화려하게 꾸민 집회, 행진, 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열면서 파상 공세를 퍼부었다. 히틀러도 독일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평소처럼 연설에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열하루 동안 모두 열두 곳 도시를 돌면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 >[[나치]]는 새로운 선전술을 동원했다. 히틀러는 미국에서 하는 것처럼 비행기 한 대를 빌려서 '''"독일을 굽어 살피는 지도자"'''라는 구호를 매달고서 첫 번째 ‘독일 비행’에 나섰다. 부활절 동안에는 정쟁을 멈추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확 줄어들어 일 주일도 채 못 되었지만 도시와 도시를 비행기로 이동하면서 히틀러는 스무 군데도 넘는 곳에서 수많은 군중을 모아놓고 연설을 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청중은 100만 명에 육박했다. 돋보이는 선거 운동이 아닐 수 없었다. 독일에서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선거 운동을 한 후보는 없었다. 이번에는 나치 진영도 실망하지 않았다. 힌덴부르크가 53퍼센트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히틀러는 37퍼센트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그저 낯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낸 것이다. 1차 선거보다 무려 2백만 명이나 많은 1천3백만 명이 히틀러를 찍었다. '''나치가 선동을 통해 만들어낸 상품이라고 볼 수 있는 지도자 숭배는 한때는 소수 광신도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독일 국민의 3분의 1에게 먹혀들었다.''' >---- >- 히틀러 1권 9장 권력 의지(524~525) 이제부터 복잡한 정치상황이 펼쳐지는데 선거에서 나치당의 힘을 확인한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분열이 시작된다. 앞서 브뤼닝 정부가 나치당이 '''건설적인 야당''' 역할을 할 것을 기대했으나 물 건너 간 적이 있었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회민주당 프로이센 주 정부 경찰[* 프로이센 주 선거는 나치당이 1당이지만 어느 당과도 연립정권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계속 사민당이 과도내각으로 눌러 앉았다. 제2당이 사민당, 제3당이 공산당.]과 국방부장관 겸 내무장관 대리 [[빌헬름 그뢰너]] 장군이 합심하여 나치당과 돌격대의 폭력적인 활동을 금지하자 그동안 나치당을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 흉내나 내는 똘마니''' 쯤으로 여기던 '''집권 보수층이 크게 반발했다.''' 그뢰너는 국방장관의 금지령에 '''탁월한 인적 자원'''의 제거에 반대하는[* 다름아닌 제2제국 [[빌헬름 2세]]의 장자 빌헬름 황태자의 고견이다. 황태자는 아버지를 따라 경박한 언행과 난잡한 행동으로 번듯한 동생들과 달리 전혀 인기가 없었다. 내심 제정 복귀를 원하던 힌덴부르크도 제정 복귀시 '빌헬름 2세면 몰라도 황태자는 좀...'이라 할 정도로 박하게 평가했고 사민당에서도 군주제로 복귀하더라도 빌헬름 2세와 황태자는 결사반대고 다른 인물이라도 일단 영국식으로 입헌주의로 뜯어고친 다음에야 논의할 일이라 보았다. 또 승전국에선 '전범으로 처리 못한 것도 억울한데 제정복고 했다간 가만있나 봐라' 하고 역시 부정적이었다. 이 밖에 제국시대 왕족 중에는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황자도 나치 지지자였고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위]] 헤센의 필리프 왕자까지 나치 지지자였으며 이쪽은 아예 돌격대 고위직까지 했다.] 민족주의 우파 그룹에게 신나게 까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치당 의원들에게 날이면 날마다 국회에 끌려나가 아무런 실드도 못 받고 하루종일 욕설과 호통 비아냥을 받아가며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원래 있던 지병인 당뇨병까지 겹쳐서 직무수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때 [[쿠르트 폰 슐라이허]]라는 정치군인이 본격적으로 나선다. 슐라이허 장군은 당시 국방부 장관 직속의 정무국장[* 정치가 군에 간섭할 수 없다는 독일의 [[군국주의]] 전통과 문민통제 개념이 없던 시대의 영향으로 대놓고 국방부 내 정무부서를 만들고 민간인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군의 이익을 변호하고 감시하는 부서였다.]으로 상관인 그뢰너 장관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라인을 타서 승승장구, 국방부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동안 군부와 정ㆍ관계의 실력자로 떠올랐던 인물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과도 젊은 시절 연대장과 첫 임관 소위로 배치될 때부터 인연이 있었고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르 대령과도 절친 사이였다. 음모와 책략에 능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1930년 사민당 뮐러 내각이 무너지고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브뤼닝 총리를 추천한 것도 슐라이허였다. 슐라이허 장군은 전형적인 [[군국주의]]자로 힌덴부르크 노인처럼 [[황제]]에게 충성한 것도 아니었고 프로이센 군부 전통의 '정치적으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의 꽉 막힌 사람도 아니었다. 제2제국이 몰락하고 나서 '군부가 나라에 수동적으로 충성하기보단 여느 정파나 정치체제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능은 국가가 쓰러지지 않도록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민족과 국익을 수호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순수한 군국주의자였다.[* Henry Ashby Turner, Jr.(1932 – 2008) 예일대 교수 역임 <히틀러의 30일>에서.] 그런 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먼저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나치당이 브뤼닝 총리의 가톨릭중앙당과 연정이 임박했다는 추측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괴벨스의 숙적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국회 연설에서 브뤼닝의 경제정책에 화답하는 내용의 경기부양책을 연설하고 브뤼닝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보도가 이미 나왔기 때문이었다. 괴벨스는 반동들과의 연정이라는 '''더러운 협잡질'''을 절대 거부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돌격대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다만 이 떡밥이 풀릴 만도 한 게 히틀러는 아무런 시인과 부인도 하지 않은 채 낚시질이나 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당시 인기가 떨어진 브뤼닝 내각의 똥을 치워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정권에 참여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권을 자기 위주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 마침 슐라이허 장군은 은밀히 나치에 접근해와서 군부의 생각은 내각과 국방장관과 다르다며 새로운 내각이 들어선다면 지지할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히틀러는 '돌격대 금지령 해제와 의회 해산 후 새로운 총선' 을 요구했고 두 가지 조건은 힌덴부르크에 받아들여진다. 이를 확인한 슐라이허는 상관인 그뢰너 장군에게 군부는 더 이상 그뢰너 장군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다며 뒤통수를 치고 힌덴부르크에게 직접 내각 총리와 국방장관의 해임 건의를 했다.[* 의회 권력이 작동하는 평상시에는 대통령 비상대권이 가동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의회 권력이 공백이면 이렇게 황제급으로 막강했던 대통령의 권한이 가능했고 이는 바이마르 체제가 망하는 큰 근거가 된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귀족 내각이 들어선 건 1930년부터 의회 내 다수가 아닌 대통령 비상대권에 임명된 대통령 내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하여 슐라이허가 직접 국방장관으로 나서며 내각을 조각한다. 자신의 베프인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듣보잡을 비롯해 각료 11명 중 7명이 Von 자가 들어가는 대통령 친위내각 성격의 이른바 '남작님 내각' 이 들어선 것.(7명을 제외한 2명은 [[재벌]] 회장에 한 명은 현역 군인인 슐라이허 장군 자신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괴벨스는 '반동'들과의 협상에서 높으신 분들과 서로가 껄끄럽고 혐오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설 기회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협상 중에 걸림돌이나 안되면 다행이었다. 슐라이허 장군과 신임 파펜 총리는 약속대로 새로운 총선을 7월 말로 잡고 의회를 해산시켜 버린다. 돌격대 금지령 해제로 기가 오른 돌격대들이 난리를 치고 다니고[* 공산당에선 자기들만 금지령이고 돌격대만 해제된 건 공개적으로 살인면허를 준 거나 다름없다고 강변했지만 애초에 금지령 따윈 이전부터 서로 아랑곳 안하고 총 쏘고 칼부림질을 해댔다. 추산하기로 1932년에 정치적 테러로 130여 명이 사망했는데 나치당이 55명, 공산당이 50명 정도였다.] 선거 달인 7월에는 하루 수십 건씩 정치적 테러와 살인이 벌어졌고 이것을 구실로 프로이센 주 정부를 강제로 해산하고 중앙정부 직속으로 돌린다. 이 과정에서 '이지도르' 모욕 사건으로 원수 사이였던 베를린 경찰청 부청장 베른하르트 바이스도 [[룬트슈테트]] 장군에게 체포당하며 괴벨스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 "서로 두들겨 패고 총을 쏘고 있다. 이 정권의 마지막 구경거리." -괴벨스의 일기 선거 결과는 대성공이라 608석 중 230석을 나치당이 차지하며(37.3%) 당당히 원내 제1당으로 등극, 1920년 이후 바이마르 시대 정당 중 역대 최대 득표율을 기록한다. 하지만 상승세는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와 비교해 현격히 둔화되고 있었고 몇 달 전 지방선거에서 50% 가까이 득표한 지방이 나왔던 것과 달리 전국 단위의 단독 과반수 확보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거듭되는 선거로 나치당 조직의 여력이나 자금은 물론 지지자들의 인내심도 바닥나고 있었다. 괴벨스는 선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권 확보는 시급하다!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하면 지지자들은 급속도로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 "우리는 쥐꼬리만큼 이겼을 뿐이다. 이제는 권력을 잡고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를 끝장내야 한다. 이대로는 안된다." -괴벨스의 일기 8월에 의회가 개원하고 협상이 열렸는데 히틀러는 앞서의 약속을 번복하고 총리와 여러 핵심 장관직을 요구하며 사실상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고, 파펜과 슐라이허는 히틀러를 달래보려 했지만 히틀러에게 총리직 요구는 이미 여러번 시도해서 이제는 단순한 협상 조건이 아닌 '''명예의 문제'''였기 때문에 괴벨스의 바람대로 타협은 없었다. 히틀러는 8월 13일 슐라이허와 파펜과 만난 마지막 담판에서 또다시 전권 요구를 했고 이어서 힌덴부르크의 면담까지 거쳤다. '보헤미안 상병(히틀러)'에 대한 판단은 2년 전의 체신부([[우체국]]) 장관 정도에서 '부총리'로 올라갔지만 부총리는 헌법상 아무 권한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지 직책으로 이를 알고 있는 히틀러가 거부하여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난다. 같은 날 슐레지엔 지방에서 '포템파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적 테러가 일어났는데 돌격대원 5명이 [[폴란드]] 공산주의자 청년의 집으로 쳐들어가 가족이 보는 앞에서 말 그대로 '밟아 죽였다'. 이 사건은 정치적 폭력 사태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파펜 총리가 정치적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신속한 재판과 사형을 선고한다고 방송한 지 몇 시간 만에 터진 사건이라 5명 모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반면 포고령에 해당 안되는 사회민주당 계열 정치깡패 [[국기단]]의 테러는 솜방망이로 처벌을 받았다. 나치당은 이에 들고 일어난다. 살인자를 공개적으로 비호하는 히틀러나 나치들보다 한 술 더 떠서 괴벨스는 '''유대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이 세상의 적''' 자체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공격>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유대인이 유죄다.''' 마치 몇 달 후 시작되는 제3제국 내내 벌어질 사건들을 예고하는 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독일 내 유대인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게 죄다' 라는 뜻으로 신세 타령으로 쓰던 말이기도 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운명을 받아들여 독일이란 나라에 충성하거나 공헌을 하면 '유대인 치곤', '유대인이 무슨 일로' 라는 소리를 듣고 인종적인 편견이나 오해받을 일들이 터지면 ''''역시 유대인!'''' 이란 소리를 듣는다며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불행한 운명을 한탄했던 것. '''그런데 이제 그 말이 유대인 탄압의 근거가 된 것.'''] 또한 의회에선 정권 타도를 외치며 국회의장 [[괴링]][* 가톨릭중앙당의 협조로 괴링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 덕에 부르주아 신문에서는 또 중앙당과 나치당의 연정 떡밥이 잠시 흘러나오기도 했다.]이 공산당과 손잡고 파펜 내각을 압도적인 표차로 내각 불신임해버리고 막장이 된 정치 상황 속에 의회는 '''또''' 해산한다. 사실 파펜이 먼저 해산권을 준비하고 혼자 다해먹으려다가 선수를 친 괴링에게 당한 것이다. 그래서 절차상 문제의 하자로 잠시 내각은 유지되었지만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